고 노무현의 스토리텔링

내가 그를 직접 본건 모두 세 번 정도였는데, 그 첫번째 기억은 2000년 5월 7일 대전에서 였다. 그때 그는 4월 13일에 있었던 총선에서 종로구라는 당선이 손쉬운 지역구를 버리고 부산에서 출마해 낙선한 직후였다. 한국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지역갈등'문제를 스스로 안고 돌파하겠다는 이 무모한 결단에 많은 이들이 감동했고, 인터넷을 중심으로 집결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팬클럽 결성을 위한 모임을 가진것이었다. 그때 나는 열여덞 고교 2학년생이었는데, 당시 강준만이 써낸 무크지들과 월간 인물과사상의 애독자였던 어머니는 자연히 노무현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기로 결심해 이미 생활 속에서 그런 정치인이 꼭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설득하고 다니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어머니를 따라서 대전에 함께 갔다. 그 자리는 팬클럽 결성을 위한 네티즌들의 첫번째 전국총회 같은 자리였다. 나는 어머니의 권유로 이미 강준만이 쓴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이라는 책을 읽고난 후였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에 대해 매력을 느꼈다. 말하자면 그때의 그는, 감동할 것 없는 기성정치판에서의 비타민 같은 존재였다. 분명히 그때는. 비극적 영웅은 이렇게 눈에 돋보이는 아우라를 갖고 탄생한다.
사실 그의 낙선은 민주당 후보라는 타이틀 때문에 너무 뻔히 예견된 결과였다. 이 지독하게 무모한 모험적 선택.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매력을 느낀건 이 지점이었다. 본래 대중은 존재 자체로 스토리텔링을 발산하는 인물에게 영웅적 예감을 느끼기 마련인데, 여느 정치인이 그러하지 않겠느냐마는 노무현은 진정 새로운 스토리텔링이었다. 그때까지 그 어떤 정치인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이 그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낳게 했다. 소신과 청렴의 정치인,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
그는 비극적 영웅처럼 입지전적 일대기도 갖고 있었다. 김해의 농가에서 태어났고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자라다, 상고를 졸업했고 대학도 다니지 않았다. 그리고 육군 땅개로써 3년의 군복무를 했고, '우리처럼', "신의 아들"이 아니었다. 7년에 가까운 사시공부 끝에 판사가 되었지만 곧 변호사로 개업했다. 요컨대, 이런 입지전적 성공담은 7,80년대의 민중들 사이의 가장 사적이고 속세적인 미담인데, 영웅의 기본 조건이라 할수있겠다. 이명박 역시 빈농의 자식으로 고생끝에 어마어마한 거부가 된 입지전적 성공담을 지니고 있다. (그에 반해 이회창이나 김영삼, 정동영 같은 이들에겐 그런 영웅담이 없으므로 속세적 '영웅'이 될 수 없는 운명이다. 이회창이나 정동영이 노무현에게, 김영삼이 김대중에게 영원한 2인자일 수 밖에 없듯이.)
고 노무현은 부마항쟁 변호를 맡게 되면서 어찌할 수 없는 민주화운동의 격랑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점 역시 남다른 스토리텔링이다. 평범했던 한 입지전적 청년이 독재의 폭거와 불의에 눈을 떠 민중들과 함께 인권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 게다가 그는 서슬퍼런 5공 유력자들이 청문회에 끌려왔던 시기, 전국으로 생중계된 청문회에서 오직 그만히 할 수 있는 신랄하고 열정적인 말빨로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청문회 스타'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무협지의 가난한 나무꾼의 가장 영웅적인 실례가 될수있겠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그런 인물상이 그의 이미지로 씌워졌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로 가장 열성적인 염원을 갖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예언자나 구세주의 출현을 염원하는 고대 피지배계급 민중들의 집단심리와 비슷한 무엇이 존재한다.
준비된 영웅이 갖추어야할 마지막 조건은 캐릭터. 그의 가장 강한 강점은 '소박함'과 '솔직함', 그리고 결벽증에 가까운 '도덕성'이라는 점이다. 그에겐 고귀하신 지배계급의 아저씨 아줌마들과 다르게, "탁 까놓고 말해보자"는 식의 솔직함과 열정 같은 것이 있었다.('있는 것처럼 보여졌다.') 그의 이런 점은 귀족들의 언어로 '교양 없음'으로 여겨지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 기성정치인의 그런 소박한 모습은 매력 포인트로서만 작용한다. 물론 이제는 이런 방식의 대중심리를 간파한 파시스트들도 같은 방식의 매체전략을 펼친다. 요컨대, 이명박 대통령이 욕쟁이할머니가 수십년째 감자탕을 끓여주신다는 전설의 돼지머리고기집에 가서 그녀를 껴안으며 소탈한척 억지로 웃는 표정을 연출하는 광고, 또는 양로원 가서 뼈만 앙상한 할머니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 사진 한장. 하지만 그때에는 노무현이 거의 처음이었고, 노무현은 그런 방식의 캐릭터적 매력을 매체를 통한 이미지 전략에 성공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런 점은 성공했다.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에 대한 여러 평가들에서 노무현 캠프의 매체전략에 대한 항목은 결코 빠지지 않았다.
어쨌든 사람들은 그가 대통령이 되어도 결코 변하지 않고, 민중적인 눈빛과 자세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리라 믿게 되었다. 요컨대 그는 어릴땐 가난했지만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된 동네친구, 동네오빠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특히 3,40대의 열광이 도드라졌다. 이들은 스스로가 실패했으며 좌절한 꿈을 안고 사는 소위 '386세대'로, 어떤 대가리들은 기성정치인이 되어 흙탕물 속에서 스스로를 더렵혔지만, 대다수 386세대는 평범한 직장인들이거나 주부들이었다. 이들에게 '노무현'이라는 상징은 잃어버린 꿈의 소생과 같은 것처럼 다가왔다. 이들은 직장에서, 가정에서, 명절에 모인 대가족의 모임자리에서, 학교에서 열렬한 선거운동원이었고, 말하자면 노무현의 당선은 바로 이들 무명의 다수 화이트컬러 노동자들이 벌인 아래로부터의 선거운동의 승리였다. 게다가 이들은 인터넷의 천국이 된 한국에서 인터넷의 주된 사용자층이기도 했다. 이처럼 노무현은 인터넷의 대중화라는 새로운 기술적 진보의 바탕에서 성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문화적 코드가 될 수도 있었고, 또한 잃어버린 꿈의 회생이자 소환이기도 했다. 그 누구도 이토록 완벽한 플롯을 갖춘 스토리텔링을 갖고있진 못했다. 겨우 꼽자면, 전태일, 정주영, 김대중, 그리고 박정희 정도일까. 그러나 지배계급의 일원인 정주영이나 김대중, 박정희들은 노무현에 훨씬 못미친다. 말년이 재미없으니까. 김대중은 노벨상 타면서 헐리우드 쌈마이처럼 돌변했고, 정주영은 노년기가 영 재미꽝이며, 박정희는 정신산만한 파시스트니까.
노무현은 뭐든 밀어 붙이는 스타일이며, 화법은 직설적이고 솔직하다. 따라서 그의 이런 점은 세간의 평가처럼 많은 적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스스로의 존재로서 자유로워 항상 올바른 정치적 입장을 취하며 솔직한 화법을 펼치는 것은 매력이 되지만, 대통령이 되어선 그가 취한 신자유주의 경제전략의 배신감 때문에 그의 지지자들마저 등돌리기 시작했다. 이라크 파병, 한미FTA, 신자유주의적 시장개방, '노무현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최다의 노동자 구속 등이 배신감을 안겨준 원인들이 된다.
나 역시 배신감을 느꼈다. 나는 좀 일찍부터였고, 어머니는 그보다 조금 늦게. 어머니는 한때 노사모 종로모임의 '장'직이나 출마를 제안받을 정도의 열성회원이었는데, 노무현 재직시절 그녀가 느낀 실망감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언젠가 그녀는 더이상 신문이나 TV를 보기 싫다고 했으며, 정치적 환멸감 때문에 더 이상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는 어차피 사X회주의자로서 살아가기를 결심했고, 나에게 있어서 정치인 노무현은 단지 '자유주의적'이며 스타일리쉬한 기성정치인에 불과하므로, 개인적인 배신감과 증오는 이내 거두어졌다. 그의 한계는 온전히 기성정치판의 한계이며, 386세대들의 부족한 각성과 공부가 만드는 필연적+시대적 한계이다. 우리들과 21세기의 민중들은 386세대와는 엄연히 다르다. 그는 나와 반대편 전선에 있는 두목이고, 나는 그 반대편에서 나의 역할과 삶에 충실하며 나의 길을 가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가 주창한 '시민민주주의론'이나 '열린사회론'은 신자유주의 비판과 자본에 대한 근본적 판단이 제거되어있으므로 허무맹랑한 이상주의라고 생각한다. 군사적이며 전세계적인 자본의 폭거에 맞선 대중운동이 빠진 민주주의는 마치 정치와 분리를 제거한 정치주의자의 주의주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향한 그의 진정성이 진실이라 믿지만, 그러려면 87년 그 당시, 기성정치판이 아니라 재야운동의 너른 들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따지자면 그런 뻔한 매너리즘의 판은 그에겐 체질상 맞지 않았을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그는 변호사라는 직업의 소유자였으니까.
그가 어떤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었건, 그의 인생은 그 자체로 강력한 매력을 지닌 스토리텔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죽음 앞에서야 그러하겠지만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에 대해 슬픈 마음을 갖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노무현의 삶의 비극성 때문이다. 그는 김상봉이 말한 것처럼 마치 한 시대의 종결을 의미하듯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80년대의 폭발적이고 전국적이었던 대중운동의 파고 끄트머리에서 그가 기성정치판으로 뛰어들은 것이라면, 그는 80년대 대중운동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했던 '지도자'들의 마지막 회한 또는 마지막 안간힘처럼 그 안에서 버티다가 불명예스럽게 은퇴(퇴임)했으며, 그 후에는 농촌마을 고향에서의 소박한 삶을 테마로 삼아 삶을 살아가려는 꿈을 가졌으나, 격정적 인생의 반대편에서 불어온 후폭풍에 의해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의 죽음은 마치 한 시대의 종결 후에 부쳐진 어떤 제의에 대한 희생재물과 같은 상징성을 지닌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조건으로서 말한 '제의'적 측면이 온전히 그의 삶과 죽음을 둘러싸고있다.
<화려하고도 치열하게 모든 것에 부딪히며 많은 적들을 만들고 많은 애증의 응원자들을 만든 비극의 영웅. 마치 한 시대의 모든 영욕들과 비극적 현실의 책임을 싸안듯 죽음을 바위 덩어리에서 뛰어내려 죽음을 맞이함 -> 그리하여 사람들은 물밀듯이 모여들어 tragos의 죽음을 추모하고 제사를 지냄. 집단적으로 내걸린 촛불로써. 추모는 곧 제사이며, 제사는 영웅의 죽음을 애도.>
뿐만 아니라, 그가 뛰어내리면서 던진 말이나, 시점, 태도 같은 것들이 그 상징성을 더 크게 해준다. 유래없이 많은 인파가 한 시골마을로 보여들고 있고, 전국의 대도시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재야의 말 꽤나한다는 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고 있고, 죽음을 추모한다. 진중권, 이정희, 권영길, 강기갑, 성석제, 홍세화, 김상봉, 윤도현. 거기에 지배계급의 잘나가는 브랜드(입)들까지. 전여옥, 조갑제, 김동길, 이재오.
슬프다. 어쨌든 이 시대는 결코 개인으로서도 행복해지기 어려운 시대다. 세련된 미디어 장치가 지난 시기 지배정치세력의 무기였다면, 지금은 오직 '공포'과 '협박'이다. 이미 거리에서는 어떤 이들에 의해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지식인들은 이렇게 노골화하기를 꺼려하며 두려워하고 있지만, 이것은 분명 진실이다. 지금은 파시스트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지배세력들이 공포를 무기로 군중을 통치하려는 파시즘 시대이다.
이렇게 하여 한 인물의 스토리텔링은 완벽한 서사성을 갖춘 비극으로서 마무리되었다. 그는 한 시대의 오욕과 영예, 도덕성이라는 명예를 얼싸 안고서, 꺼져가는 도덕성의 무기를 체 죽일 수 없어 스스로 죽음을 택하여 제물이 됨으로써, 그 다음 숙제를 남겨진 이들에게 안겨준 체 죽음을 맞이했다. 이 사람은 본능적으로 상징의 정치와 시대의 서사성을 다루기를 아는 인물이다. 그는 정치적 사망이 가까워올 즈음에 스스로의 제물이 되어 영원히 사는 길을 택했다.
7년전 한때, 내가 10대이던 시절 노사모 회원이기도 했던 나는 한 개인 노무현의 죽음에 슬퍼하면서도, 마냥 그 죽음 앞에 철판 두껍게 깔고 누구처럼 "존경한다"는 말을 할 순 없다. 내가 그리하면, 왠지 죽음의 무게에 순차를 두는 것같은 느낌이 생겨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이던 시절에 대규모 농민 시위 도중 농민들이 경찰의 방패에 맞아 죽었으며, 수십명의 노동자들이 제 몸에 불을 살라 죽었고,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만드는 빈곤 확대와 양산의 그늘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삶의 어두운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비극의 행렬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그러나 이것은 노무현에게로 돌리지 않고마는 것은 지금 그것을 막지 못하는 것이 과거에 행정수반으로서 그 극우적 경제정책을 추진한 어리석었던 노무현 정권에게 있었던 것처럼, 그것을 막아내지 못한 사회운동 세력의 무능함에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비극적 죽음 앞에선, 적어도 5년간은 '노무현'이라는 이름 앞에로 겨눠져있던 억압받는 이들의 화살을 이제는, 이름없는 죽음들의 책임을 "386다운 종결"을 맞이한 세대에게 책임을 돌리는게 낫겠다. 그는 한때 과두 개혁세대의 우두머리였으면서도 자신의 동지였던 그 386정치인들로부터 우애롭게 보호받지 못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라는 괴물 앞에서 갈팡질팡 갈피를 못잡는 어리석은 회의주의자들에 불과하니까. 이들은 지금도 갈팡질팡하며 파시즘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한다. (한심하다.) 어쨌든, 고 노무현 같은 인물은 역사 앞에 흔히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인물의 등장과 죽음은 한 시대의 폭발과 종결을 예고(또는 선포)한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드러나는 삶의 비극성을 보니, 어떤 알수없는 슬픔이,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역겨움과 공포, 암울한 미래 앞에 또 다른 슬픔이. 그러나 예로부터 인간의 희망은 비극으로부터 탄생된다. 사람들이 비극적 인물의 죽음 앞에 제의를 올리며 춤을 추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비극 앞에서 일종의 책임감을 덜어내려는 속죄의 춤이자,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되는 시점 앞에서 추는 0.001퍼센트 확률의 희망의 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과 구원을 염원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