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불법이주자들에게 우리가 빚지고 있는 것

『웰컴』 불법이주자들에게 우리가 빚지고 있는 것

오랜만에 광화문 시네큐브에 가서 영화 <웰컴>을 봤다. 이 영화에 대해서 그 어떤 수식, 찬사, 마케팅적 수사들도 어울리지 않으며, 충분하지 않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극장을 나오면서 나는 눈물을 닦아내야 했다. 3년 만이었다. 2006년 가을, 청춘을 무너뜨릴 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 홀로 찾아간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수영요트경기장에서 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이후 처음이었다. 그때 내가 수영만의 그 바닷바람을 아일랜드 독립운동 과정에서 죽어간 사회주의자들이 스친 '보리밭'의 바람처럼 느꼈듯, 어제 밤 흥국생명 빌딩에서 맞이한 차가운 공기는 도버해협의 살을 에는 추위처럼 느껴졌었다. 바로 그때 전세계의 불법이주자들과 나는 공명할 수 있는 것일까? 칼레의 시민들이, 한국의 '시민권자'들이 불법이주자들을 "환영한다(welcome!)"고 말하면서 동시에 환영하지 않았고말았던 사태들 이후에 도래한 '이 영화'에 의해서 나는 불법이주자들에게 톡톡히 빚을 진 사람으로서, 도리어 저들 불법이주자들에게 "환영(welcome)"받았음을 느꼈다. 그 감흥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필립 리오레가 감독하고 프랑스의 국민배우라는 뱅상 랭동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 세계화된 신자유주의의 참혹한 현실이 만드는 비극을 '필름' 안에 담아내고 있다. 차라리 이 영화에 대해서는 "감동적이다!", "가슴 뜨거운 감동!", "현실 문제를 독하게 천착하는 영화!" 따위의 말을 붙이지 말라. 그 경구들은 너무나 연약하고 얄팍하며 짤막해서, 이 영화에 대해, 그러니까 불법이주자들에게 우리가 톡톡히 빚지고 있는 바들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도리어 이 영화를 소개하는 리플렛의 이면에는 에티엔 발리바르가 쓴 "불법이주자들에게 우리가 빚지고 있는 것Ce que nous devons aux "Sans-Papiers)"을 바치는 것이 나으리라.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그러니까 불법이주자들의 문제가 유럽 전역에 만연화되기 시작하던 그 해 1997년에, 영화인들의 공동작업에 의해 조직된, "쌩 베르나르(Saint-Bernard)의 불법이주자들"에 헌사된 회합에서 읽혀진 바 있는 이 텍스트가, 이 '늦은' 영화 <웰컴>의 적확한 '이면'을 구성하지 않는가. 요컨대 눈에 밟히는 영화 잡지들에 게재된 형식적이고 고루한 영화평들은 집어치우자는 것이다. 그런 말을 뱉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가난해지지 않는가?

1.

“우리는 그들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통의 방벽들을 깨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즉 경범죄와 침입의 환상들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개별성 및 근대 프롤레타리아의 조건의 보편성을 갖는 노동자들로서, 이 곳과 다른 곳 모두의 가족들로서 보고 듣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공적 공간 내에 정보의 지배적 독점에 의해 유지되는 스테레오타입들 대신 이주(immigration)의 실제 문제들에 관한 사실들, 질문들, [의견]대립들 그 자체를 유통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합니다. 집단적 토론의 제도로서, 그러나 그것의 조건들이 결코 위로부터 주어지지 않는 것으로서 말입니다. 억압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과 가시성과 신뢰성에 대한 권리를 그 당사자들이 쟁취하는 것이 항상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조용한 용기를 가지고 해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상황이 종종 절망적일 때조차 미디어를 탈만한 폭력과 희생의 손쉬움을 거부하면서 말입니다.”

느낀 바, 이 영화는 우리 시대의 피할 수 없는 진실의 몇가지 항목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선 첫째로. (발리바르의 언급을 반복하건대) "우리는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점. 그러니까 그들이 '이미' "교통들의 방벽을 깨고 근대 프롤레타리아의 조건의 보편성을 만들어내면서 결국 전취해낸 그들의 질문들, 대립들, 문제에 대한 사실들로 인해 우리가 '이 세계'의 문제를 직시하게 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영화에서 수영강사 시몬(뱅상 랭동 분)이 이혼 직전의 위기에 처한 고독한 중년 남자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어떤 불편한 계기가 이 열일곱살의 쿠르드족 소년 비랄(피랫 아이베르디)으로부터 제기되는 바가 바로 발리바르 텍스트의 이 항을 드러낸다. 불편한 계기란 소년이 트럭 짐칸 안에 숨어 영국으로 가는 것을 실패하게 된 이후에, 오로지 헤엄을 쳐서 영국으로 건너가겠다는 무모한 결의로 수영장을 찾은 것에서 유발된다. 처음에 시몬은 '당연하게도' 신경증을 보이며 "내 삶에 끼어들지말라"고 말하지만, 별 도리없이 그는 점점 이 쿠르드족 소년들의 삶에 끼어들게 된다. 비랄의 그 어떤 행동도, 결의도 시몬에게는 납득되지 않는 것이었다. 왜 수영도 못하는 이 소년은 죽음에 처할지 모르는 모험을 감수하려고 하는가? 그것이 시몬이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이다. 왜 그는 죽으려 하는가? 비랄의 이유는 단순하다. 그곳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모술에서 헤어진 연인 미나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시몬은 몇 차례에 걸쳐 "너는 도버해협을 절대 건널 수 없어. 거기는 수온이 10도도 되지 않고 몇몇 위대한 선수들만이 겨우 해낸 곳이야. 게다가 파도는 얼마나 센데."라며 말리려고 한다. 하지만 이 운명적 도전 앞에 '합리'는 이미 고개를 내밀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시몬이 비랄에게 고가의 잠수복을 주는 그 순간, 그리고 반지(이혼한 전 부인이 쇼파 사이에 떨어뜨려 잃어버린 반지)를 건네주는 순간, "교통들의 방벽"이 무너지는 순간이 도래하는 것이다.

2.

“우리는 그들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현실주의", 행정 능력, 정치적 책임의 한 쪽(인구의 흐름을 규제하고 공적 질서를 유지하며 합법적 이주자들의 "통합"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 운운)과 민족주의적이고 선거주의적인 선동의 다른 한 쪽(불안정에 대한 희생양을 지목하고, 대중의 빈곤에 대한 공포를 동일성에 관한 갈등의 환상적 공간 속으로 투사하는 것) 사이에서 기회주의적으로 양다리 걸치는 계속되는 정부의 위선을 파열시켰습니다. 불법이주자들은 자신의 불법성에 대한 관리가 국가에 의해 개혁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창출된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조작에 이를 수밖에 없는 그와 같은 불법성의 생산은 시민적 권리들(특히 소급법의 불허로부터 존엄성 및 신체적 온전함의 존중에 이르는 개인들의 안전)에 대한 지속적인 침해 없이, 그리고 네오-파시즘과 그것의 주창자들과의 지속적인 타협 없이 행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외에 대한 입법과 차별적 이데올로기들의 확산을 연결시키면서 일종의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로 향해 가는 제도적 인종주의의 연장의 주요한 메커니즘들 가운데 하나를 폭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또한 이러한 악순환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를 보여줬습니다. 역사와 인간조건에 관한 진리를 재수립하고 자신의 권리들의 보편성 및 자신의 문화들의 기여를 꺼내듦으로써 말입니다.”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예심판사는, 경찰들은, 행정당국의 위선적 행태들을 보라. 그들은 원천적인 '연대'의 윤리가 작동하게 되는 것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은 발리바르의 텍스트가 서술된 지 12년 후의 '칼레' 집단수용지역 근방의 현실이다. 불법이주자들이 민족주의와 선거주의적 선동의 이면에서 보여주는 '위선'을 파열시키면서, 프랑스 정부는 법적인 위용을 과시하게 되는데. 불법이주자들의 '이주', '거주'의 권리 뿐만 아니라, 칼레의 시민들이 불법이주자들을 돕고 잘 곳을 마련해주는 것 자체, 그러니까 결국 이 '시민권자'들과 '시민권'이 없는 '불법이주자들'이 서로의 방벽을 깨고 연대를 구성할 권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발리바르가 말한 바, "불법성의 생산"을 자행하는 것이 아닌가.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반역적이며 고독한 저항주체 시몬과 비랄은, "제도적 인종주의의 연장의 주요한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저항자들이 아닌가. 그들이 감행하는 '위험한 도박'이 바로 이 제도들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최초의' 도전이 아닌가. 반대로 지고지순하게 배식 자원봉사를 하던 두 명의 시민 활동가들의 행위는 얼마나 쉽게 체제 내적인 것으로 수렴되었는가?

칼레에서 시민들이 나서서 불법이주자들을 돕는 것은 '불법행위'이다. 비가 오고 날이 추워 차에 태워주는 것조차, 잘 곳이 없는 그들을 위해 잠 잘 곳을 제공해주는 것조차 '불법' 항목에 속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이 고독한 윤리주의자 시몬이 점점 법적인 경계의 외부로 나아가게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런 과정에서 시몬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법 외에도 하나 더 있다. 어쩌면 그것은 법보다 더 강력한 걸림돌인지도 모른다. 시몬이 사는 아파트의 여러 이웃들, 전 부인, 이주자들을 위해 배식 자원봉사를 하는 남자까지, 시몬에게 비랄을 재워주는 것은 그만둬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가 이렇게 작동하고 있는 상태 자체야말로 진정한 '고독'이 아닌가?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고 취급되어왔던, 또는 때때로 항상 시몬의 '무관심'을 힐난하기도 했던 자원활동가들마저 "위험하니까 그만 둬야하지 않느냐"고 말하지 않는가. 고독한 주체 시몬은 이데올로기 앞에서 보다 더 고독의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3.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들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그렇게 1995년 12월의 동맹파업자들과 함께) 우리 안에서 시민권을 재창조했습니다. 시민권이 하나의 제도나 지위가 아니라 집단적인 실천인 한에서 말입니다. 그들은 "도시"의 삶에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기여하기 위해 하나의 민족성원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뿐만 아니라 전투성의 새로운 형태들을 자극하고 그것의 오래된 형태들을 혁신하면서 그러한 시민권의 재창조를 스스로 행했습니다. 전투성은 그것이 능동적 시민권의 모두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분명히 그것의 필수 불가결한 구성요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적인 무감증을 개탄하면서 동시에 프랑스 영토(그리고 더욱 일반적으로는 유럽의 영토)에 머무는 외국인들의 권리들을 둘러싼 최근의 대중동원들의 의미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계화의 시대 안에서 사회적 변혁과 씨빌리테의 관점들을 열어내기 위해―그리고 예컨대 경찰과 국경의 제도들의 민주화를 개시하기 위해―그토록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러한 초민족적 차원을 정치적 능동성에 부여하는 일에 공헌했습니다.”

'시민권(씨빌리떼)'을 재창조하는 발현의 순간이 비랄에게도, 시몬에게도 있다. 비랄이 결국 감행하는 비극적 모험. 그것은 그 모든 죽음의 위협, 불가피한 현실의 압도적 상황, 제도의 위협, 경찰권력의 협박들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완전히 깡끄리 무시하는 실천이 아니었는가. 그는 자신의 '권리' 자체를 온 몸으로 실천해냈다. 제도에 의해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승인되지 않더라도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 거주할 권리, 그리고 추상적으로는 '사랑할 권리'마저 쟁취해낼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그 모험이 죽음과 그리 멀리 떨어져있기 힘들다는 것을 그는 힘겹게 인정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가 보여준 도전이 어떤 영토 자체의 붕괴를 드러내주고 있지 않는가? * 이하 가려진 부분은 영화감상을 위해서 어쩌면, 가려져야할지도 모르는 중요한 스포일러 대목임 => 그가 결국 고작 '800m'를 남기고 비극을 맞이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시몬에게도 '시민권 재창조'의 순간은 있다. 그것이 작은 단초이라 할지언정 그는 '감행'했다. 우선 그는 모든 법적인 제약과 위협 자체를 교묘하게 회피하거나 거짓말로 위장하기, 또는 있는그대로 거부할 것을 선언함으로서 자신의 '권리', '연대'의 손을 잡을 권리를 체현해냈다. 왜 내가 그를 도우면 안되는 것이냐고, 묻지 않는 그의 무거운 입은 국가기구에 대한 경멸적 어조까지 숨기고 있는 듯 하다. 그러니까 아예 묻지 않음으로서, '법' 자체의 작동을 부정하려는 몸부림이 보이는 것이다. 또 마지막 시퀀스에서 그가 보석 석방 이후에 이동의 권리가 제한되어있는 상황에서도 결국 런던의 미나에게 '반지'를 전해주러 가는 것은, 최종적 거부 상태를 보여준다.

또한 그가 맥도널드에서 자리를 일어설때 tv 생중계로 보여지는 호날두의 골인 장면은 참으로 절묘하지 않는가. 호날두의 골인, 비랄이 꿈꾸었던 '미래'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던 호날두나 맨유가, 유럽 대륙을 휘감고 있는 열광적인 축구 열풍이, 이 세계의 아무 행복도 보장해주거나 회복시켜줄 수 없음을, 도리어 우리의 현실에서 도피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묻는 듯이 시니컬하게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4.

마지막으로 시몬이 감행하는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주목하라.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닌가. 그가 잃게 된 사랑, 전 부인과의 관계맺음이 회복될 단초는 어디에서 주어지는가? 비랄이 자신의 애인 미나에게 다가가기 위해 감행하려 했던 그 무조건적이며 헌신적인, 죽음을 무릎쓰는 실천행위로서의 '사랑'이 시몬에게 옮겨진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시몬이 모든 비극을 맞이한 이후에 비로소 '런던'에 가서야 그는 그 사랑의 실천을 감행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또 한편 시몬은 비랄이 이행하려고 했던 '실천'과 '선언'의 행위를 대신 실천할 것을 요청 받은 자의 삶을 살고 있는게 아닌가? 마치 죽음을 무릎쓰고 이 약속을 지켜달라고 요청받은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고독한 관객들이여, 이 사랑의 전이 순간을, 주목하라. 불법이주자들에게 우리가 빚지고 있는 바들을 각인하라. 그렇다면 우리의 삶도 전혀 다른 것으로 변화되지 않겠는가? 이는 정말 톡톡히 빚지고 있는 바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항목이다.

이 영화는 올 한해 프랑스 영화가 '겨우' 거두어낸 값진 성취이다. 여전히 프랑스 영화의 미래에 희망이 남아있다면 이 영화 덕분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해서 훨씬 '덜' 언급되는 시장의 상황에서, 우리는 영화를 열렬히 지지하는 자의 자세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가 드러내는 환상---그러나, 환상 이면에는 그저 텅 비어있는 가벼움으로 가득찬---의 미학에서 담론을 유지시키기엔 현실은 보다 더 담담하게 영화를 볼 자세를 요구하고있지 않을까. <웰컴>에 대해서 말하자. 시혜적으로 우리가 그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불법이주자들에게 우리가 빚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하자. 아직 이 영화는 '아직' 극장에 걸려있다.


"불법이주자들"에게 우리가 빚지고 있는 것

Ce que nous devons aux "Sans-Papiers"
에티엔 발리바르

우리가 부여한 "지하생활"을 거부하고, 머물 권리라는 질문을 힘차게 제기했던 "불법이주자들"에게 우리 프랑스 시민들은 성별, 출신, 직업을 막론하고 엄청난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삼중적인 확인을 빚지고 있고,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책임을 부여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통의 방벽들을 깨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즉 경범죄와 침입의 환상들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개별성 및 근대 프롤레타리아의 조건의 보편성을 갖는 노동자들로서, 이 곳과 다른 곳 모두의 가족들로서 보고 듣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공적 공간 내에 정보의 지배적 독점에 의해 유지되는 스테레오타입들 대신 이주(immigration)의 실제 문제들에 관한 사실들, 질문들, [의견]대립들 그 자체를 유통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합니다. 집단적 토론의 제도로서, 그러나 그것의 조건들이 결코 위로부터 주어지지 않는 것으로서 말입니다. 억압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과 가시성과 신뢰성에 대한 권리를 그 당사자들이 쟁취하는 것이 항상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조용한 용기를 가지고 해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상황이 종종 절망적일 때조차 미디어를 탈만한 폭력과 희생의 손쉬움을 거부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현실주의", 행정 능력, 정치적 책임의 한 쪽(인구의 흐름을 규제하고 공적 질서를 유지하며 합법적 이주자들의 "통합"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 운운)과 민족주의적이고 선거주의적인 선동의 다른 한 쪽(불안정에 대한 희생양을 지목하고, 대중의 빈곤에 대한 공포를 동일성에 관한 갈등의 환상적 공간 속으로 투사하는 것) 사이에서 기회주의적으로 양다리 걸치는 계속되는 정부의 위선을 파열시켰습니다. 불법이주자들은 자신의 불법성에 대한 관리가 국가에 의해 개혁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창출된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조작에 이를 수밖에 없는 그와 같은 불법성의 생산은 시민적 권리들(특히 소급법의 불허로부터 존엄성 및 신체적 온전함의 존중에 이르는 개인들의 안전)에 대한 지속적인 침해 없이, 그리고 네오-파시즘과 그것의 주창자들과의 지속적인 타협 없이 행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외에 대한 입법과 차별적 이데올로기들의 확산을 연결시키면서 일종의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로 향해 가는 제도적 인종주의의 연장의 주요한 메커니즘들 가운데 하나를 폭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또한 이러한 악순환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를 보여줬습니다. 역사와 인간조건에 관한 진리를 재수립하고 자신의 권리들의 보편성 및 자신의 문화들의 기여를 꺼내듦으로써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들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그렇게 1995년 12월의 동맹파업자들과 함께) 우리 안에서 시민권을 재창조했습니다. 시민권이 하나의 제도나 지위가 아니라 집단적인 실천인 한에서 말입니다. 그들은 "도시"의 삶에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기여하기 위해 하나의 민족성원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뿐만 아니라 전투성의 새로운 형태들을 자극하고 그것의 오래된 형태들을 혁신하면서 그러한 시민권의 재창조를 스스로 행했습니다. 전투성은 그것이 능동적 시민권의 모두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분명히 그것의 필수 불가결한 구성요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적인 무감증을 개탄하면서 동시에 프랑스 영토(그리고 더욱 일반적으로는 유럽의 영토)에 머무는 외국인들의 권리들을 둘러싼 최근의 대중동원들의 의미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계화의 시대 안에서 사회적 변혁과 씨빌리테의 관점들을 열어내기 위해―그리고 예컨대 경찰과 국경의 제도들의 민주화를 개시하기 위해―그토록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러한 초민족적 차원을 정치적 능동성에 부여하는 일에 공헌했습니다.

그리하여 "배제된 자들" 가운데 "배제된 자들"(그리고 분명히 그들만이 유일한 배제된 자들은 아닙니다)인 불법이주자들은 단순히 희생자들을 형상화하기를 멈추고 민주적 정치의 행위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저항과 상상력으로 우리가 민주적 정치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일을 크게 도왔습니다. 진정 우리는 그들에게 이것을 인정할 것을 빚지고 있으며 중단 없이 그들의 편에 최대한 함께 할 것을, 권리와 정의를 그들에게 회복시켜줄 것을 빚지고 있습니다.

Subscribe to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운다

Don’t miss out on the latest issues. Sign up now to get access to the library of members-only issues.
jamie@example.com
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