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를 상상하다 - 닫힘과 열림』을 읽었다

『아시아를 상상하다 - 닫힘과 열림』을 읽었다

주말에 읽은 <아시아를 상상하다 - 닫힘과 열림>은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메가아시아연구사업단이 기획해 역사 속의 '아시아들'에 대한 최근 연구들을 묶은 책이다.

이 책은 전통시대 아시아인의 아시아 상상을 역사학적, 사상적, 인식론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정박적이고 고정된 아시아 범주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유동하고 다원적이었던 범주를 상기하고자 하는 시도다. 수록된 글들 모두 흥미로웠는데, 그 중 특히 "명 태조 주원장의 고려국왕 책봉: 조작된 기록, 책봉의 실상"(구범진), "16~17세기 격동하는 동아시아 해양 질서 속 팽호와 대만"(채경수), "따라잡기형 발전모델과 16~19세기 아시아의 설탕 교역"(강진아), "15~18세기 중국 동남 지역과 해양 질서의 모호성: 류큐를 중심으로"(조영헌) 등이 재밌었다.

  • 2000년 이후,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등장하기 전의 동아시아에서 장기 평화가 가능했던 것이 중국 중심의 위계적 조공체계 덕분이라는 연구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으나, 당대의 여러 사료를 다각도로 분석해보면 <대명회전>이나 <명태조실록> 등이 상당한 사실의 은폐와 왜곡을 노린 고의적 축약이나 날조를 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실증적이고 다층적으로 비교해 디테일을 살피지 않으면 이런 의도적 왜곡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주원장의 고려국왕 책봉 사례가 그러한데, <명태조실록>은 마치 고려 공민왕이 먼저 나서서 책봉을 간청했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다른 여러 사료와 대조해보면 이것이 날조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명과 고려의 국교 수립 과정에서 주원장과 공민왕이 고려한 현실의 지정학적 상황에서 충분히 이해가능한 행동들의 결과였다. 둘은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신화'나 '오해'로부터 자유로운 현실 정치가였다는 것. 주원장은 거란을 정리하기 위해 탐라로부터 군마 1만필이 필요했고, 고려는 대륙의 불안정한 세력 교체기에 세밀한 정세 판단과 안정이 필요했다. 우왕 책봉은 당시 공민왕과 주원장의 동상이몽에 의한 거래의 결과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 사례를 들어 "조공질서가 동아시아 장기 평화를 지탱했다"는 언술을 펴는 것은 설득력을 상실한다. (최근에 발표된 케임브리지대학 논문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듯…)
  • 17세기까지만 해도 중국 왕조들에게 대만섬은 미지와 야만의 섬이었을 뿐이다. 세력권에 포함되지도 않았고, 오늘날 대만섬의 대문으로 취급되는 인근의 펑후이열도가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된 것도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명이 펑후이열도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을 인지한 것은 16세기 접어들어서였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여전히 왜구(13~17세기 동아시아 해역의 해적들;)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그러다 복건 왜구를 토벌하던 명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펑후이를 최전선으로 삼아야 동중국해 일대의 무역이나 조공, 복건과 광둥 연안의 정치적 안정성이 확보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1600년대 초에 처음 펑후이열도를 점령해 무역의 근거지로 삼으려 했지만, 명군의 포위에 의해 대만섬으로 밀려났고 자연스레 대만섬을 점령했다. 명군은 동인도회사가 오히려 대만섬에 터를 잡길 권장하기까지 했다. 즉, 당시에는 펑후이까지가 복건 연안의 가장 먼 섬으로 인지됐고, 대만은 여전히 미지의 땅이었다. 당시 지도들만 보더라도 중국 대륙의 대만 인식이 매우 부정확했다는 걸 알 수 있다.
  • 중국대륙의 대만 인식이 마침내 자리 잡은 것은 청나라부터다. 1684년 청조는 대만섬의 정씨왕국을 토벌하고 점령했고, 그 전의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 18세기 초 강희제는 서양에서 온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명해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라는 거대한 동북아시아 지도를 제작했는데, 이 지도에는 일본은 통째로 빠져있지만, 대만의 서쪽 연안과 그 위도가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중국대륙과 대만섬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300년 전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Subscribe to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운다

Don’t miss out on the latest issues. Sign up now to get access to the library of members-only issues.
jamie@example.com
Subscribe